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헤르타 BSC (문단 편집) == 역사 == ||<-2> {{{#!wiki style="margin: -5px -10px" [[파일:bildschirmfoto-2017-10-09-um-15-02-37_1507554594-768x432.jpg|width=100%]]}}} || || {{{#!wiki style="margin: -5px -10px" [[파일:Hertha_BSC_Gedenktafel.jpg|width=100%]]}}}|| ||<-2> {{{#!wiki style="margin: -5px -10px; padding: 5px 10px; background-image: linear-gradient(to right, #004d9e 0%, #005aab 20%, #005aab 80%, #004d9e)" '''{{{#fff 헤르타 BSC가 창단된 장소로 알려져 있는 아르코나플라츠의 벤치, 베를린 미테에 위치해 있다.}}}'''}}} || [[1892년]] [[7월 25일]], 프리츠 린트너 & 막스 린트너 형제와 오토 로렌츠 & 빌리 로렌츠 형제는 [[베를린]]의 아르코나플라츠의 벤치에서 축구단을 구성하기로 하였다. 4명의 소년들이 구단명에 대해 고민하던 중, 프리츠 린트너는 얼마 전 자신의 아버지와 하벨 강에서 함께 한 증기선 여행을 기억하였다. 그 증기선의 이름은 '''헤르타'''였고, 색은 '''파란색과 하얀색'''이었다. 증기선에 영감을 받은 두 형제는 구단명과 상징색을 결정한 뒤 프리츠 린트너의 삼촌 에른스트 비쉬의 도움을 받아 몰켄마르크트의 경찰청에서 구단명을 '''베를리너 푸스발 클럽 헤르타'''로 등록하였고, 그를 초대 회장으로 추대하였다. 베를린의 명문 구단, [[헤르타 BSC]]가 이날 창단되었다. 헤르타는 초기에 몇몇 구단들과 친선 경기를 주최하였으나, 구단 운영의 주 목적은 회원들의 친목이였기 때문에 성장의 한계를 보였고, 실제로 회원 수가 4명까지 감소하기에 이르렀다. 그러나 이 시기에 당시 베를린의 강팀이었던 알레마니아 90이 분열되어 일부 회원들이 구단에 합류하였고 결과적으로 회원 수는 증가하게 되었다. 여담으로 헤르타는 등록된 구단이었기 때문에 베를린의 공공 경기장 '엑세르'를 이용할 수 있었으나, 공과 유니폼은 선수들이 직접 가져와야 했고, 선수들은 인근 식당을 탈의실로 이용하였다. 1894년 2월 13일, 헤르타는 '토어 & 축구협회 베를린'[* Thor- und Fußballbund Berlin, 약칭 TuFB.] 창립 회원으로 참여했으나 같은 해 11월 27일 '독일 축구 & 크리켓 협회'[* Der Deutsche Fußball- und Cricket Bund, 약칭 DFuCB.]를 거쳐 1900년 10월 27일 '독일 구기구단 협회'[* Verband Deutscher Ballspielvereine, 약칭 VDB.]에 가입하였다. 1905년, 헤르타는 [[미테구]] 게준트부르넨에 위치한 셰베라 광장[* 현 노르덴 노르트베스트 광장(Norden-Nordwest-Platz), 약칭 NNW 광장(NNW Platz).]으로 홈 구장을 이전하면서 안정적인 팬 기반을 확보하였고, 다음 해인 1906년 베를린 축구 선수권 대회에서 구단 역사상 첫 번째 우승을 차지하면서 1907년 독일 축구 선수권 대회에 참가할 자격을 얻게 되었다. 헤르타는 디펜딩 챔피언 [[VfB 라이프치히]]를 준결승에서 만나 패배하였다. 1910년, 헤르타는 잉글랜드의 세미프로 축구단 [[사우스엔드 유나이티드 FC]]와의 친선전에서 승리하며 잉글랜드 세미프로 축구단을 꺾은 최초의 대륙 축구단이 되었다. [[1920년대]]초 재정적 위기로 인해 베를린의 다른 클럽인 [[베를린 SC]]와 잠시 합병하며 팀명을 현재의 이름인 헤르타 BSC로 바꾸었다. 합병하며 재정적 위기가 해소되자 20년대말엔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었다. 지역 리그 챔피언들이 모여 벌이는 독일 전국 챔피언십 결승전에 [[1926년]]부터 6년 연속 진출한 것이다. 그러나 내리 4년을 준우승하다가 [[1930년]]에 첫 우승하면서 비로소 [[콩라인]]에서 탈출했다. 이 우승으로 재정적으로 여유가 생기자 다시 [[베를린 SC]]와 분리되고 포상금을 지불한뒤 다음시즌인 [[1931년]] 다시 한번 우승을 거둔다. 하지만 이 기세를 이어갈 찰나에 [[나치]]가 집권하고, [[제2차 세계대전]]이 터지고, 나치는 졌고, [[베를린]]은 [[연합국]]에 의해 [[독일 분할|두 동강]]이 나면서 이 팀의 침체기가 시작되었다. 그래도 베를린의 대표 클럽이라서 [[1963년]] [[분데스리가]] 출범 당시 원년 멤버로 낄 수 있었다. 문제는 [[1965년]] 정해진 급료 체계[* 당시 분데스리가는 일정 금액 이상 선수 임금을 지급할 수 없도록 규정한 임금상한선 규정이 있었다. 이 규정은 [[1971년]] 선수들이 돈을 받고 승부조작에 가담한 사건이 나오면서 폐지된다.]를 넘어서 선수들에게 급료를 준 사실이 드러나 강제로 강등된 것. 다만, 이건 헤르타 입장에서 정말 억울한데, 이는 동독 한 복판에 낀 서베를린으로 아무도 오려고 하지 않아서 하는 수 없이 임금을 높게 지급했기 때문이다. 하지만, [[1971년 분데스리가 승부조작 사건]]에 가담한 것은 두고두고 까일 일. 다만, 그들이 주범은 아니라서 큰 처벌은 받지 않았다. 이 때의 강등을 딛고 바로 승격해서 [[1970년대]]에는 준우승도 한 차례 기록하는 등, 제법 괜찮은 성적을 냈다. 그러나 서베를린에 고립된 클럽이라는 지역적인 한계는 계속 팀의 운영에 악영향을 미쳤다. 고립된 섬으로 선수들을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더 많은 급료 지출이 필연적이었기 때문이다. 그런데 경영진은 이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돈을 계획적으로 쓰기보다 더 함부로 쓰는 등, 경영이 완전히 막장이었고, 급기야 부실 경영으로 인해 팀이 흔들리면서 강등, [[1980년대]]와 [[1990년대]]까지 17년을 하부리그에서 보내는 수모를 경험한다. 팀 경영진이 얼마나 막장인지 알려주는 일화가 있다. 동서 분단 당시 동베를린의 헤르타 팬들의 비밀 모임이 있었다. 헤르타 구단 측도 이를 알고 있었는데, '''문제는 이를 구단 홍보 문구에 그대로 삽입한 것.''' 당연히 [[동독]]의 [[슈타지]]가 알아챘고, 결국 동베를린의 헤르타 팬들은 그대로 [[코렁탕]] 크리... 동네에서 나온 [[1980년대]] 독일 최고의 테크니션인 [[피에르 리트바르스키]]는 그냥 가만히 넋놓고 있다가 [[1. FC 쾰른|FC 쾰른]]에 뺐겼다. 다행히도 [[1989년]] [[베를린 장벽]] 붕괴 이후로는 이런 급료 체계의 필연적인 한계를 넘어서 도약할 수 있었고, 동베를린 지역의 팬들까지 흡수하면서 베를린에서 최고의 명성을 자랑하는 팀으로 도약했으며 그동안 2.분데스리가에서 머물던 팀은 [[1996년]]에 부임한 위르겐 뢰버 감독의 지휘 하에 1996/97 시즌에 3위로 1부에 승격했다.. 하지만 이미 부실화된 경영으로는 뭘 해 볼 도리가 없어서 1998/99 시즌에 한번 챔스에 나간 것을 빼고는 대체로 중위권 정도를 전전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